그럼 미인계를 쓰죠.발단은 그 한마디였다. 다나는 눈썹을 삐뚜름하게 치켜세웠다. 손 안에는 한 남자에 관련한 자료가 가득했다. 나가. 나이는 스물셋. 출생부터 유명한 남자였다. 외가는 재계의 총수, 친가는 정계의 큰 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신분제가 남아 있다면, 그 정점일 남자. 쉬이 닿을 수 있는 것은 질시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선망하기 마련이다. 그가 강력한 초능력을 가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연예인도 아니거늘 기자들은 나가의 일거수일투족을 특종이라며 내보냈다. 그러한 시선을 알고 있는지, 나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면서도 적당히 친근감과 호감도를 쌓았다.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그런 나가의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히어로기관 스푼이 유일했다. 조사한 바로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초능력을 가졌지만, 직접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범죄 컨설턴트로서 세계 대부분의 범죄에 관여했다. 도움이 될 만한 범죄자들과 조력자들을 연결시켜주고, 계획을 조정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이번 선상파티도 그러한 ‘사교’의 연장선이었다. 그 간의 범죄에 관해서도 심증은 확실했지만 섣불리 나설 순 없었다. 그의 집안과 대중의 호감으로 인해 자칫하면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컸다. 오늘의 회의는 선상파티에 잠입하여 앞으로 일어날 범죄와 관련한 확실한 물증을 찾아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다 나온 것이 바로 미인계였다.
“야, 맘만 먹으면 헐리우드 톱스타도 침대에 끌어들일 수 있는 애한테 미인계가 통하겠냐?그리고 만약 외부인 쓰면 안전문제는 또 어쩔 건데.”
“에이, 서장님. 외부인은 못쓰죠. 히어로에서 골라야지.”
“스푼에서 쟤 눈에 찰 만큼 잘난 사람이 있다고?”
다나가 갸웃하며 미간을 구기자,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쏠렸다. 직원들의 시선에 다나가 황당하다는 듯, 서류를 집어던졌다.
“이 새끼들이…. 니들 걔랑 나랑 몇 살 차이인줄은 알아?”
“원래 미인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 법이죠.”
“이게 뚫린 게 아가리라고 콱.”
깐족대던 귀능이 대표로 다나에게 맞는 사이에, 여직원들이 다나에게 달라붙어서 설득했다. 어차피 누가 가도 스푼에서 파견되었다는 정보가 퍼질 텐데, 그럴 거라면 서장님이 가는 쪽이 명분도 확실하고 유사시에 대비도 편하다는 말이었다. 어차피 안 먹힐 미인계라면, 다나의 출현으로 압박을 주는 편이 낫지 않겠냐는 의견도 덧붙였다. 다나는 마지못해 납득했다. 드레스 입힐 생각 하지마라. 죽는다, 진짜. 이어진 말에 스푼 여직원들은 모두 실망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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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장을 구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당당하게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다나가 흥미로웠다. 여자라고 들었는데 왁스로 쫙 밀어 넘긴 머리하며, 올 블랙으로 갖춰 입은 수트가 누구보다 잘 어울렸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저뿐만이 아니었는지, 회장 안의 모든 이의 시선이 다나에게 옮겨갔다. 가드가 다나에게서 정중하게 지팡이를 건네받았다. 마음만 먹으면 두부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여자니, 호신용으로 들고 온 것은 아닐 터다. 설마하니 진짜 ‘미인계’로 온 것은 아닐 테고, 압박인가…. 나가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녀가 나가에게로 천천히 걸어가자, 그와 거래하기로 약속한 인물들이 바짝 긴장으로 굳어졌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제가 초대한 것도 아닌데.”
뼈 있는 나가의 웃음에도 다나는 심드렁하게 회장을 둘러봤다. 아는 얼굴들이 많았다. 빌런들은 다나와 눈이 마주칠세라 서둘려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말이다. 나가는 당황했다는 티를 내는 빌런들이 고까워서 속으로 혀를 찼다. 어차피 히어로라도 명분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기회는 많으니 다음을 기약하면 그만이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나가는 교활한 웃음을 입가에 띄워보였다. 여흥을 망쳤으니, 그녀의 신경이라도 긁을 셈이었다.
“미인계를 쓰려고 할 때에는 보통 당사자의 취향을 고려하는 법인데… 성별조차 구분 안가는 여자라니 내게 너무 무심한 거 아닌가?”
“…지금 누구한테 찍찍 반말이에요~. 나이 차이 좀 고려하지?”
“난 그쪽을 알고, 그쪽도 날 아는데…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껴서.”
“너 지금 범죄자라는 거 시인하는 거냐? 내가 녹음기라도 들고 있으면 어쩔래.”
나가는 대답 없이 눈을 깜빡이며 웃어보였다. 그가 투시능력을 가졌음을 아는 다나는 쯧, 혀를 차고는 술잔에 입을 대고 들이켰다. 아쉽네. 정말 예쁜 여자였으면, 접대라고 생각하고 한번쯤 넘어가볼까 생각했는데. …남자랑 자는 취미는 없어서.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뱉은 속삭임에 다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다나는 들고 있던 잔을 던져 깨부순 뒤, 목을 조이고 있던 넥타이를 잡아끌었다. 기다란 쇼파에 몸을 늘어트리듯 앉더니 기다란 다리를 척 꼬았다. 갑작스런 소란에 이목이 쏠렸음에도 다나는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그저 단정한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겨서 흐트러트렸을 뿐. 앞머리가 반쯤 내려오자, 흉흉한 붉은 눈동자와 어우러져 위험한 분위기가 풍겼다. 난 지는 싸움은 안 하는 주의라. 꿀꺽, 누군가의 침소리가 선연했다. 나가의 두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정점에서 태어나, 지배자로 자랐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를 산산조각 낼 만큼 강력한 초능력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고는 모두가 그를 경외하다시피 했다. 가지지 못한 것도, 가지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가 좋든 싫든 그에게 대적하려 들지 않았기에, 나가는 아마 죽을 때까지 자신이 지루하게 살다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무료한 삶에 다나가 쏘아들어 온다. 완벽한 삶에 오점을 찍기 위하여. 형형하게 타오르는 눈동자에 숨이 막혔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뭐?”
“나랑 올라갈래요? 당신이 흥미로워할 만한 이야기가 있는데.”
연회장의 모두가 숨을 멈췄다. 당황한 다나가 그의 진의를 파악하려 인상을 구기자 나가가 날큼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다나는 경계하면서도 몸을 피하지는 않았다. 야수에게 후퇴란 곧 패배였기 때문이다. 나가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에 바짝 입가를 가져다대고는 덧붙였다. 내가 졌다는 뜻이에요.내 인생을 망치러온 나의 구원자. 나가는 처음으로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