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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ission; 弶 For. 렝]

늘 마감하는 사람 2017. 10. 13. 04:34

 

BGM



  그즈음의 나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자신이 있었다. 내게 따라붙는 수식어만 봐도 그랬다. 예쁘고, 총명하고, 구김 없이 상냥한 아이. 주변의 이웃들에게서 늘 칭찬만 받고 자라왔다. 심지어 내게는 동네 또래들과 다른 아주 특별한 비밀도 있었다. 나는 마법사였다. 어머니는 이따금 내게 속삭였다. 언젠가 마법사 세계에, 그녀의 집에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때마침 가문에 마법을 쓰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다고 했다.

        마법사가 마법을 쓰지 못하면 어떡해?

  어머니는 기묘한 미소를 짓더니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란다. 아무것도 되지 못 해.

  그녀는 분명 미소 짓고 있었지만, 나는 압박감을 느끼고 바짝 몸을 말았다. 내 머리를 넘겨주는 어머니의 손은 표정과는 달리 몹시도 따뜻했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니, 네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녀의 말대로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내가 마법을 쓰지 못했더라면, 집안의 가족사진들은 어쩐지 어색해졌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누구보다 기억조작마법을 능숙하게 다뤘다.

 

***

 

  사실 조금은 기대했던 것 같다. ‘스큅의 부모들은 다감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내가 펼치는 마법을 보고서는 장하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어른들을 기다리는 동안 먹으라며 간단하고 달콤한 요깃거리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모든 평화는 커다랗고 굳센 문에 들어섰을 때, 산산조각이 났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느냐!”

  쩌렁쩌렁한 고함에 나도 모르게 어머니에게 바짝 붙어 섰다. 두 노인은 쇼파에 앉아 나를, 아니 정확히 말해선 어머니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일말의 시선조차 받지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냉대요, 완벽한 무시였다. 고상하지만 날카로운 설전이 오고 갔다. 나는 몹시도 겁에 질려있었고, 무엇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실은, 오만한 어린아이의 오기였을지도 모른다. 손끝에서 빛이 솟더니, 조금 어둑했던 방을 훤하게 밝히고는 이내 터져 색색의 불꽃으로 녹아내렸다. 그제야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나는 조금 우쭐한 기분이 되어서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를 띠고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무어라 입을 떼려는 순간, 조부가 혀를 차더니 못마땅한 얼굴로 뱉었다.

        “피가 섞인 반쪽짜리 잡종 따위가 태어나봤자, 우리 하등 가문에 쓸모가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느냐?”

        “우리에겐 정당한 혈통인 트럼피가 있으니, 그 애도, 그 애의 하잘것없는 재주도 필요 없단다.”

  그 애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어.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다. 모멸감에 덜덜 다리를 떨고 있자니, 어머니의 한숨이 내게 꽂혔다. 어머니처럼 되고 싶었다. 아니, 어머니처럼 되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늘 입버릇처럼 내게 맹세시켰다. 네 어머니처럼 되어야 한다.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지, 힐라? 자동응답기처럼 대답을 읊고 나면, 흡족한 듯 웃으며 이래야 내 딸이지,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건 꼭 어떠한 경고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를 닮지 못해 그들을 실망시킨다면, 지금의 행복은 모두 지워질 것이라는 무언의 겁박에 가까웠다. 겁에 질려 어머니를 쳐다보면, 그녀는 늘 세 걸음쯤 물러나 방관하고 있을 뿐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서로를 사랑했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

 

***

 

  하잘 없이 걸었다. 그저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어머니는 자신들의 부모가 뱉은 모욕에도 불구하고 가벼이 미소 지으며 냉정하게 돌아섰기 때문에, 나도 그녀처럼 꼿꼿하게 굴어야만 했다. 무서웠다. 울고 싶었다. 이대로 발끝부터 닳아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곳에서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린다면, 그것은 정말 나의 미숙을 증명하는 셈이 되므로 참아야만 했다. 어머니처럼 이성적이게. 어머니처럼 냉정하게. 어머니처럼. 그러나 마음과는 다르게 머릿속은 어지럽기만 하였다. 발끝만을 보고 얼마나 걸었을까, 내 앞을 막아선 자그마한 발에 절로 시선이 올라갔다.

        “네가 힐라 로에아스구나.”

  연한 청회색 단발머리가 고개와 함께 흩어져 내렸다. 치켜 올라간 분홍빛 눈꼬리에는 호기심과 더불어 특유의 오만함이 묻어났다. , 떨고 있니? 그 애는 키득거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 저택에 당당히 다닐 수 있는 내 또래라면 단 한 사람일 테니, 나는 그 애가 누구인지 쉬이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는 너는 트럼피 체스터.”

  낯선 여자아이가 제 이름을 말할 줄은 몰랐는지, 그 애의 눈이 조금 깜빡였다. 반쯤은 대단하다는 눈빛이었다. 마치, 동물이 사람을 알아보면 으레 짓곤 하는. 나는 그 눈빛에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왜 왔어? 못 보던 사촌이 반가운 건 아닐 테고. 구경하고 싶었니? 아니면 너희 조부들이 나더러 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오라던?”

  냉랭하게 쏘아붙이려 했다. 그러나 나를 벌레만도 못하게 바라보던 그들의 시선이 떠오르자 몸이 바짝 굳어버렸다. 최대한 고개를 들고 당당히 굴었으나, 채 숨기지 못한 두려움이 내 입가를 떨리게 했다. 들었을까? 실수한 스스로가 짜증스러웠다. 긴장으로 허리를 꼿꼿이 펴고 그 애를 쳐다보았다. 머릿속에서는 그 애가 날 모욕할 것을 대비해 수십 가지의 대답을 곱씹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애는 맑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왜 할아버지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난 그냥 네 얼굴이 궁금했을 뿐이야. 근데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든다. 내 친구 시켜줄게.”

  나의 의사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이 의문이 아닌, 단정조로 어미를 맺고 있었다. 실없이 웃는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지만, 별로 동요하고 있다는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싫어.”

        “? 그럼 내 장난감 할래? 시종은 어때?”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말해대는 것이 어쩐지 위협적으로 느껴져 한걸음 물러섰다. 친구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들이 장난감이나 시종이라니. 나는 본능적으로 이 애가 말하는 친구란 갖고 놀다 버리는 물건과 진배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두침침한 복도의 한가운데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이 퍼렇게 번뜩였다. 그 애는 독촉하듯 내 입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동시에 복도에 걸린 모든 초상화가 눈을 돌려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수십 개의 시선이 내게 박혀 든다. 마법사 세계에서는 그림이나 사진이 움직인단 것을 어머니에게 듣기는 했지만, 귀곡성에서나 볼 법한 섬뜩한 광경이었다.

 

  이 가문의 모든 것에 환멸이 났다. 마법도 못 쓰는 버러지들을 손주로 두고 있는 주제에 그깟 혈통이 뭐라고 어머니와 나를 잡종 취급한 늙은이들도, 어두침침한 저택과 처음 만난 사람을 종으로 삼겠다고 말하는 버릇없는 계집애도 싫었다. 힐라, 어디에 있니? 때마침 나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울렸다. 질려버린 내가 얼굴을 구기며 돌아서자, 그 애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내 손목을 잡아챘다. 뿌리치려 했으나,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내 손목이 허옇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게 무슨!”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우리. 그렇지?”

        “, !”

  이리저리 흔들어 보았지만, 내 손목에서는 불안한 덜걱거림만 들렸을 뿐이다. 나는 덜컥 겁을 먹었다. 어머니가 나를 이대로 버리고 갈지도 모른다는 기이한 망상이 나를 사로잡았다. 끊어지기 직전의 신경 줄이 손목의 고통과 함께 나를 옥죄어왔다. 덫에 걸린 짐승이 서서히 죽어갈 때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단단히 묶여 다가오는 어둠을 넋 놓고 바라봤을까? , , 바닥에 신발이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애는, 나를 더 깊은 곳, 더 어두운 곳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알겠어, 알겠다고! 나는 안간힘을 써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그 애의 눈이 가늘어진다. 갑작스레 놓아버린 덕분에 반작용으로 나는 바닥에 나뒹굴어졌다. 또 봐. 그 애가 뭐라고 하던 나는 달렸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 애는 나를 쳐다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

 

  늦었구나. 어머니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본능적으로 그 애에게 잡혀 멍이든 손목을 뒤로 숨겼다. 죄송해요. 그녀를 몰래 살폈으나, 오히려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금방이라도 저택을 나갈 것 같던 그녀는 천천히 복도 중간쯤의 방문 하나를 열었다. 터키색 벽지를 꽉 채울 만큼, 커다란 나무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신기하게도 나무 곳곳에 열린 것은 열매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체스터 가문의 가계도. 나는 숨을 죽였다. 어머니가 벽 한구석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까맣게 태워버린 곳을 만졌기 때문이다. 호적에서 파였음을 증명하는 그을음을 만지면서도, 어머니는 태연한 기색이었다. 손에 묻은 재를 탁, 털어내며 그녀는 내게 웃어 보였다.

        “엄마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뛰어났단다. 내 딸이니 너도 분명 그럴 거야.”

  그녀는 다감하게 나를 끌어당겨 꼭 안아줬다. 엄마는 너를 믿어. 그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동안, 나는 가만히 숨을 참았다. 함부로 숨을 뱉었다간, 볼썽사나운 딸꾹질을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반쪽짜리라면, 내게 반쪽밖에 없다면, 내 나머지 반쪽은 어디에 있을까. 불에 탄 어머니의 이름 아래에 선명하게 쏘아오는 트럼피 체스터. 그 애의 열매는 공간이 부족했는지 어쨌는지, 반쯤 잘린 모양새였다. 시선은 떨어지고, 손목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간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 멍이 아주 오래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손목을 잘라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