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ission; 백일몽. For. 메주]
“큼, 거, 주말에 시간 좀 내죠?”
얘 또 이러네. 라이오라는 제 옆의 시뻘건 꼬맹이가 큼큼거리는 꼴을 가만 바라보았다. 슬금슬금 제 눈치를 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휙 돌리곤 했다. 벌써 한두 번이 아닌데도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라이오라는 바쁘다고 말하려다 결국에는 고개를 주억거리고 만다. 아직 앳된 그를 보면, 자꾸 져주고만 싶었다.
벌써 다섯 번째 데이트였다. 영화관, 놀이공원, 동물원, 수족관…. 확실히 그 나이 때 또래들이나 갈 법한 장소였지만,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영화는 그도 자주 즐기는 취미 중 하나고-정확히 말하면, 무라사가 열광하는 할리우드 상업영화보다는 독립영화를 선호하지만-, 놀이공원도 사람들의 표정을 구경하는 것은 그럭저럭 재밌었다. 살아있는 생물들을 관찰하는 것은 몇 세기가 지나도 흥미로우니 동물원이나 수족관도 좋았다. 동물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저 멀리 구석으로 도망가버렸지만 말이다. 인간보다 몇 배나 위험 감지가 예민한 동물들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무라사는 그것에 마음이 쓰였었나 보다. 그 날, 제 표정을 자꾸만 살피더니 끝내는 헤어질 때, 기념품점에서 산 쓸데없이 크고, 비싸고, 뚱뚱하고, 부드러운 인형을 사서 품에 안겨줬다. 걔는 당신한테서 안 도망갈 거야. 인형이니 당연한 소리였지만, 어쩐지 라이오라는 그날부터 잘 때 인형을 안고 자기 시작했다. 시체처럼 차가운 몸에 인형을 끌어안은 부위만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언제나 관계를 이끄는 것은 무라사였다. 무라사 저도 모르는 전생의 습관과 상대가 무라사라면 장소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라이오라 특유의 무심함이 합쳐진 결과였다. 그러나 ‘그’ 무라사도 다섯 번째 데이트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 야구장 한 번도 안 와봤어요?”
두 손에 치킨과 맥주를 든 무라사가 그를 보며 웃는다.
***
“난… 규칙도 모르고, 응원하고 있는 팀도 없는데.”
“에이, 괜찮아요. 원래 야구장은 분위기로 오니까.”
대충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와 자리에 앉은 무라사가 치킨을 펼쳐 들 동안, 라이오라는 사람들의 응원 소리와 노랫소리에 정신이 팔렸다. 무라사가 익숙하게 응원용 풍선 막대기를 받아들고, 공기를 불어 넣어 라이오라에게 쥐여줬다.
“보다 보면 대충 알게 되는데, 이해 안 되면 물어봐요.”
“너 그리고, 미성년자가 술…”
“쓰읍, 자 시작한다. 빨리 앞에 봐!”
작은 공 하나에 울고 웃는 사람들은 분명 유쾌했다. 전생에서는 누군가를 호위하느라, 이런 요란 법석한 분위기를 느껴본 적이 없기도 했다. 야구도 한 번 룰을 알게 되자, 단순하지만 스릴 넘치는 경기가 즐거웠다. 어색하게 사람들의 응원 구를 따라 하고, ‘우리’팀이 1점씩 낼 때마다 와, 환호하며, 기름진 음식들을 끊임없이 입에 밀어 넣는 이 순간이 낯설고도 좋았다. 사랑이란 게 참 무섭죠. 라이오라는 문득, 무라사에게서 전생의 모습을 찾아내려 애쓴다.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전광판이 둘의 모습을 비췄다.
와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경기장을 울렸다. 당황해서 설명을 바라는 것처럼, 무라사를 빤히 쳐다보자 그는 벌건 뒷목을 쓸며 멋쩍게 웃는다. 손을 내젓다가도 화면이 사라지지 않자, 무언가 결심한 듯 라이오라의 손목을 잡는다. 그리곤, 찬찬히 라이오라에게 다가온다. 낮게, 두 눈을 바라보며, 무라사는 그렇게, 또 한 번….
“나랑 사귈래요?”
“뭐?”
“나랑 사귀자, 응?”
입을 맞춘다. 주변의 환호 소리 때문인지, 때마침 터져 나온 폭죽 때문인지 귀가 먹먹했다.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은 우주에 나온 자신이 보는 환상일지도 몰랐다. 라이오라는 무라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렇다면 깨지 말아야지. 라이오라는 자꾸만 지금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꾸고 싶어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