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ission; 回顧錄. For.례림]
서슬 퍼런 여름이었소.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던 어린 청춘들이 한 뙤기도 되지 않는 방 안에 옹송그려 앉아 떼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소. 아까운 목숨을 져버리는, 철없는 것들이라 말은 하고 있었지만 내심 그네들을 존경했다오. 설령 이루지 못할 푸른 무지개라 할지라도, 모국에 애정을 가지고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어찌 부정할 수 있겠소? 그러나 이 늙은 몸뚱아리는 처자식이 있었고, 잡혀 들어갔다간 그들은 분명 배곯다 죽을 게외다. 골방에 갇혀있는 이 어린 투사들 속에도 유독 눈이 빛나는 이가 있었소. 어름어름 귀띔으로 듣자하니 명문가의 자식이라 하더이다. 이 환란에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들만큼 신이 난 것도 없을 게요. 이상을 위해 가시밭길을 택하는 모습이 꼭 나를 질책하는 것만 같아 그 방을 지나칠 때마다 몹시 부끄러웠소. 반란을 일으킨 주도자였기에 그 이는 독방이 주어졌다오. 그 방을 감시하는 이는 악랄한 고문기술자로 이름 높은 여간수였소. 그러나 그녀의 첫 부임부터 함께한 나로서는 속으로 그녀를 가엽게 여겼소. 벌건 홍옥 속, 채 감추지 못한 두려움과 갈망을 엿봤기 때문이오. 어른스러운 척 굴었지만, 그녀는 온기를 갈구했고 성공을 열망했소. 아름답고 영민했으나 비천한 신분이었기에 출세하지 못한 그녀가 저가 갖추고픈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추락해버린 죄수를 보았을 때 느낀 감정을 생각해보오. 그것은 단순한 질시가 아니외다. 분노요, 비관에 사로잡힌 그녀는 통렬하게 죄인을 유린했소. 아, 참으로 그 여인은 고결했다오. 죄상을 인정하라는 간수의 비명소리, 피비린내와 탄내가 자욱했음에도 비명소리는 일절 들리지 않았으니. 여러 날이 흘렀소. 저보다도 두 세배는 큰 덩치를, 세치 혓바닥과 섬세한 날붙이 몇 개로 굴종시켰던 여간수의 자존심이 금이 갔으리란 걸 쉽게 짐작 할 수 있을 거요. 그 당시에는 죄수의 인권이 보호되는 어떠한 조항도 없었으니 허연 피부에는 썩은 내가 나기 시작했소. 교묘하게 얼굴에는 고문을 피했기 때문에 면회에는 무리가 없었다오. 그녀의 동지는 석방을 위해 사방으로 노력했으나 정작 본인과 집안의 뜻은 한결 같았소. ‘옳은 일을 한 것이니 어떠한 항소를 기대말고 죽으라.’ 사형집행일이 정해지자 더 이상의 고문은 무의미했소. 이미 모진 신문으로 신체는 형편없이 망가져버렸으나 재판 날에는 두 발로 걸어 나와야 했기에 우습게도 간수는 죄수를 간병해야할 처지가 되었소이다. 분명 여간수는 반발하였소. 그러나 그녀는 책임이 있었고, 지언한 상부의 명령이었기에 끝내는 수락할 수밖에. 고국의 독립에 몸을 던진 담대한 처녀에게 공경심을 가지던 나였기에, 혹여나 표독스러운 여간수가 그녀를 괴롭히지는 않는지 살피러 가던 참이었소. 밤볕이 내리 쬐는 독방에서 놀랍게도 여간수는 여린 무릎에 친히 그녀의 죄수를 눕혔다오. 실은 애모하는 연인처럼, 다감한 누이처럼, 한 육신처럼 두 몸은 바짝 붙어 엉겼소. 홀린 듯 벽 뒤에 몸을 숨기고는 숨죽여 여인들을 지켜 보다 덜컥 폐부를 막은 것은, 번쩍이는 눈물이라오. 제가 죽음으로 몰아넣고선, 간수는 악어의 눈물을 뚝뚝 그녀의 죄인에게 선사하고 있었소. 울음으로 뭉그러진 작은 속삭임들이 이어지더이다. 그 밤, 여간수가 죄수의 열에 달뜬 몸을 닦아주며 무슨 말을 했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오. 어떤 생각을 하고, 왜 그리 하였는지도 끝내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게외다. 그러나 기적과도 같이 처형 날, 여인은 두 발로 우뚝 서 재판을 받을 수 있었고 이는 모든 이의 뇌리에 남았음을. 사형장으로 가기 전, 영광스럽게도 그녀의 마지막 걸음은 나와 함께 했소. 그녀는 정중하게 내게 부탁하길, 말 한마디 전해달라고 청했소.
디오, 나는 너를 살린 것을 후회치 않아.
그 말을 건넨 죄인은 웃었지만, 간수는 눈물을 쏟았으니, 참으로 아이러닉하오. 아, 서슬 퍼런 여름이 끝나가오. 청춘들이 수장된 이 땅 위에 반향은 이해타산을 뚫었소. 침묵은 무뎌지고 태양은 비상하오. 마침내 다가온 푸르른 봄녘을 보시오. 볕뉘 아래 황홀하게 푸르른, 저 봄녘을 보시오.